신주주말특간 2026 0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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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니소니 조회 71회 작성일26-08-17 20:13본문
# 여동촌 농민화 이야기
2003년, 향에서 부기원으로 일하던 정리미는 랑근이 빚을 갚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집을 찾아왔다.
그의 집은 창문도 제대로 없을 정도로 생활환경이 어려웠다. 그런데 집 안에는 그림이 많이 걸려 있었다. 정리미는 그 그림들을 보고 이것이 랑근이 직접 그린 것인지 물었다.
랑근은 회화를 무척 좋아했다. 낮에는 밭에 나가 일을 하고, 밤에는 침대 머리맡에 엎드려 그림을 배웠다.
정리미 역시 그림을 좋아했기 때문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여동촌에는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 많았다. 그렇다면 농민화 협회를 만들어 서로 교류하고 그림을 배우도록 하는 것은 어떨까?
이렇게 하면 서로의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농민들의 새로운 수익 창출 경로도 만들 수 있었다.
공동의 노력으로 2003년 여동 농민화 협회가 설립됐다.
당시 회원은 18명에 불과했지만 협회는 활기가 넘쳤다.
정리미의 요청으로 협회에 가입한 랑근은 뛰어난 실력으로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격려를 받으면서 랑근은 삶에 대한 자신감을 되찾았다.
감귤 재배원에도 조금씩 생기가 돌아왔고, 그림 실력 역시 서로 교류하고 배우는 과정에서 나날이 발전했다.
마침내 풍작을 거둔 랑근은 빚을 모두 갚고 새로운 삶을 맞이하게 됐다.
## 농민화 협회의 시작
촌민들은 정기적으로 옛 당지부 서기의 집에 모였다.
여동 농민화 협회가 설립될 당시에는 자금과 시설이 매우 부족했다. 그래서 당시 당지부 서기는 자신의 집 북쪽 방을 내어 화실로 사용하도록 했다.
조건은 매우 열악했지만 사람들의 그림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촌민들도 수시로 구경하러 찾아왔고, 마당은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 후 부군에서 사생을 하던 중국미술학원 학생들도 이곳 농민화가들의 이야기를 듣고 산골마을을 찾아왔다.
학생들과 농민화가들은 함께 그림을 그리며 실력을 겨뤘다.
당시 학생들은 농민화가들이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많이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농민화가들은 전문적인 교육이나 엄격한 회화기법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자유롭게 표현했다.
현장에서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그림으로 표현하는 방식이 오히려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여동 농민화의 명성이 점점 높아졌고, 협회 회원도 빠르게 늘어났다.
지원이 이어지면서 협회는 좁은 마당에서 널찍한 문화창작센터로 옮겼다.
촌민들은 마침내 전문적인 책상과 그림 도구를 갖게 됐다.
## 다시 붓을 잡은 화가들
여건이 좋아진 것을 누구보다 기뻐한 사람은 여통덕이었다.
그는 마을의 1세대 화가였지만 중간에 4~5년 동안 붓을 잡지 못했다.
당시 마을에서는 그림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농민화가들은 서로 작품을 보여주며 실력을 겨루는 경우도 많았다.
협회에 가입한 여통덕은 다시 붓을 잡기 시작했다.
2005년에는 처음으로 주급 미술전에 참가해 2등상을 받았다.
과거에는 취미로만 여겼던 농민화에서 수입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여동촌 농민화가들은 고향을 벗어나 시·성급 대회를 거쳐 전국으로 진출했다.
세상이 넓어졌고 농민화가들의 수입도 점점 늘어났다.
마침 저장성에서 아름다운 농촌 건설 사업이 추진되던 시기였다.
농촌 곳곳에서 아름다운 마을을 만들기 위한 사업이 진행되면서 주변 농민화가들의 인기도 크게 높아졌다.
여동의 농민화가들은 매년 벽화 작업을 통해 10만 위안에 달하는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벽화 하나를 완성하는 데 약 20일이 걸렸고 하루 수입이 600위안에 달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전에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 자신만의 그림을 찾다
이름처럼 호랑이 그리기를 좋아했던 한 화가는 초창기에 매일 많은 시간을 그림 연습에 쏟았지만 작품은 늘 만족스럽지 않았다.
어느 날 한 선생님이 그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 말은 그에게 큰 깨달음을 줬다.
당시 여동의 많은 화가들은 기본적인 회화 전문지식이 부족했고 자신의 취향에 따라 자유롭게 그림을 그렸다.
예술에서 상상력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예술 역시 결국 생활에서 나온다.
아무리 그림을 잘 그리려고 해도 실제로 본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생생하게 표현하기 어렵다.
선생님의 한마디를 들은 뒤 농민화가들은 주변의 세상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푸른 산과 산등성이, 황금빛 논밭, 황금빛 탈곡장, 산꽃, 그리고 마을의 정겨운 아침 풍경까지.
예술가의 시선으로 다시 이 땅을 바라보자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마당을 활보하는 수탉과 주변의 동물들도 새로운 그림의 소재가 됐다.
화가들은 단순히 동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동물의 움직임과 성격까지 세심하게 관찰했다.
깊이 있는 관찰과 이해를 바탕으로 그려낸 수탉은 위풍당당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쳤다.
2010년에는 그의 작품이 전국 농민화 전시회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한 작품의 성공은 다른 여동 화가들의 자신감을 키워주는 계기가 됐다.
## 생활에서 탄생한 농민화
여동 농민화는 농촌 생활과 노동 현장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마을의 새로운 모습을 묘사한 작품, 생태 신촌의 풍경, 이웃집의 대청을 그린 작품, 세월과 여가를 표현한 작품, 절기와 풍속을 담은 작품 등이 만들어졌다.
이 작품들은 전국적인 전시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
농민화의 명성이 높아지고 화가들이 전문 화가로 거듭나면서 여동 농민화의 작품 가격도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처음에는 농민이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화가가 되고, 다시 전문 예술가로 성장해 갔다.
하지만 그림을 향한 열정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낮에는 농기구를 들고 밭에서 일하고, 밤에는 붓을 들었다.
침실을 화실로 사용하고 문짝을 화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들이 그리는 선은 점점 섬세해졌고 색채는 더욱 풍부해졌다.
마음속 세계도 점점 넓어졌다.
그들은 사계절의 변화를 그렸고, 생활의 달콤함을 그렸으며, 자신들의 새로운 삶을 그렸다.
그리고 마침내 여동 농민화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 농민화에서 문화관광으로
농민화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여동촌을 찾는 관광객도 많아졌다.
농촌 관광 역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마을에는 미술관과 대나무공예관, 농경문화원 등이 들어섰고 젊은이들도 고향으로 돌아와 가게를 열었다.
다른 마을에서는 지역 특산물을 판매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여동촌의 가게에서는 농민화를 활용한 문화창의 제품을 판매했다.
특히 술병에는 아무런 그림이 없는 흰색 라벨을 붙여 놓고 관광객이 원하는 그림을 즉석에서 그려주는 서비스도 시작했다.
한 관광객이 술병에 연꽃을 그리고 싶다고 하자 화가는 그 자리에서 그림을 그려줬다.
농민화가 술병에 더해지면서 평범한 술이 특별한 문화상품으로 바뀌었다.
농민화가 인쇄된 실크와 스카프, 휴대전화 케이스, 다기 등 다양한 문화창의 상품도 판매됐다.
여동촌에서 판매하는 문화창의 상품은 통합적으로 설계하고 제작했다.
농민들은 자신의 회화 작품을 통해 수익을 얻을 수도 있었다.
## 농민화와 지역상품의 결합
여동촌의 전문 경영인들은 새로운 사업 모델을 찾기 시작했다.
2015년 그가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여동 농민화는 이미 어느 정도 명성을 얻고 있었지만, 실제로 높은 가격에 판매되는 작품은 많지 않았다.
농민화를 어떻게 활용해 마을의 발전을 이끌 수 있을까?
여동촌 사람들은 먼저 농민화를 활용한 문화창의 상품을 생각했다.
하지만 단순한 문화창의 상품만으로는 수익을 크게 높이기 어려웠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한 국수 가공소를 지나가다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진가승례의 국수 가공소는 수십 년 동안 운영되면서 좋은 국수를 만들어 주민들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산간마을을 벗어나지 못해 판매시장을 넓히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가공소에서는 국수를 도시로 가져가 판매하려고도 했지만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기가 쉽지 않았다.
여동촌 사람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포장 디자인을 고민했다.
농민화의 아름다운 그림을 국수 포장에 적용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새로운 포장 덕분에 산골마을에서 생산된 국수가 대도시에서 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기존에는 1년 매출이 30만 위안 정도였지만, 새로운 포장과 브랜드를 적용한 이후 연간 매출이 700만 위안 이상으로 늘었다.
20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이제는 연간 수천만 위안의 매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은 것은 국수뿐만이 아니었다.
여동촌의 귤도 농민화와 새로운 포장 디자인을 활용했다.
기존에는 귤을 그대로 판매하면 1근에 몇 마오에서 1위안 정도밖에 받지 못했다.
하지만 새로운 포장을 개발한 뒤에는 5~8위안에 판매할 수 있었고, 가격이 가장 높았을 때는 1근에 20위안까지 올라갔다.
생활에서 탄생한 농민화가 다시 생활 속으로 들어가 농산물 판매를 이끌게 된 것이다.
## 여동 농민화 미술관
2020년에는 약 4,200여 제곱미터 규모의 중국 향촌미술관이 여동촌에 세워졌다.
이 미술관은 여동 농민화를 집중적으로 전시하는 플랫폼이 됐다.
미술관에서는 화가들의 작품을 수집해 농민화 작품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또한 기업은 이러한 자원을 활용해 다양한 문화창의 상품을 연구·개발했다.
농민화 온라인 거래 플랫폼도 개설했다.
기업과 협력해 농민화로 브랜드 로고를 제작하고, 이를 통해 얻은 수익을 배당금 형태로 촌민들과 공유하고 있다.
2023년 여동촌 농민화와 문화창의 상품의 매출액은 3천만 위안을 넘어섰다.
촌민들의 1인당 연간 소득도 크게 증가했다.
## 농민화의 디지털화
이날 미술관의 멀티미디어실에서는 선생님의 지도 아래 태블릿으로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배우고 있었다.
이는 여동촌이 새롭게 모색하고 있는 방향이다.
농민화를 디지털 플랫폼과 결합하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그림을 한 점씩 만들 수 있지만 인터넷에서는 하나의 작품이 수천 개의 디지털 소장품으로 변신할 수 있다.
현재 여동촌 농민화 디지털 소장품 가운데 경매 최고가는 한 점에 4만 6천 위안을 기록했다.
농민화가 디지털 기술과 만나면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 그림에서 저작권 산업으로
오늘날 여동촌은 그림을 판매하던 단계에서 풍경을 판매하는 단계로, 다시 문화창의 상품을 판매하는 단계에서 저작권을 판매하는 단계로 산업을 발전시키고 있다.
농민화는 향촌진흥의 길에서 새로운 역할을 하고 있다.
오색찬란한 농민화는 산골마을의 유구한 역사를 그려내고 있다.
또한 고향을 벗어나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변화의 오늘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힘차게 비상하는 내일의 모습도 그리고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고향은 많은 추억을 남긴다.
맑은 물과 깊은 향수, 그리고 지나가는 세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고향의 모습.
농민화는 바로 이러한 삶과 기억을 화폭에 담아내고 있다.
여동촌의 농민화는 농민들의 삶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이제는 농촌의 경제를 변화시키고, 문화관광을 발전시키며, 지역 특산물의 가치를 높이는 새로운 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그림 한 장에서 시작된 작은 변화가 한 마을의 삶을 바꾸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미래를 만들어주고 있다.
구독 과 좋와요 해주시면 큰힘이됩니다.
2003년, 향에서 부기원으로 일하던 정리미는 랑근이 빚을 갚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집을 찾아왔다.
그의 집은 창문도 제대로 없을 정도로 생활환경이 어려웠다. 그런데 집 안에는 그림이 많이 걸려 있었다. 정리미는 그 그림들을 보고 이것이 랑근이 직접 그린 것인지 물었다.
랑근은 회화를 무척 좋아했다. 낮에는 밭에 나가 일을 하고, 밤에는 침대 머리맡에 엎드려 그림을 배웠다.
정리미 역시 그림을 좋아했기 때문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여동촌에는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 많았다. 그렇다면 농민화 협회를 만들어 서로 교류하고 그림을 배우도록 하는 것은 어떨까?
이렇게 하면 서로의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농민들의 새로운 수익 창출 경로도 만들 수 있었다.
공동의 노력으로 2003년 여동 농민화 협회가 설립됐다.
당시 회원은 18명에 불과했지만 협회는 활기가 넘쳤다.
정리미의 요청으로 협회에 가입한 랑근은 뛰어난 실력으로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격려를 받으면서 랑근은 삶에 대한 자신감을 되찾았다.
감귤 재배원에도 조금씩 생기가 돌아왔고, 그림 실력 역시 서로 교류하고 배우는 과정에서 나날이 발전했다.
마침내 풍작을 거둔 랑근은 빚을 모두 갚고 새로운 삶을 맞이하게 됐다.
## 농민화 협회의 시작
촌민들은 정기적으로 옛 당지부 서기의 집에 모였다.
여동 농민화 협회가 설립될 당시에는 자금과 시설이 매우 부족했다. 그래서 당시 당지부 서기는 자신의 집 북쪽 방을 내어 화실로 사용하도록 했다.
조건은 매우 열악했지만 사람들의 그림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촌민들도 수시로 구경하러 찾아왔고, 마당은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 후 부군에서 사생을 하던 중국미술학원 학생들도 이곳 농민화가들의 이야기를 듣고 산골마을을 찾아왔다.
학생들과 농민화가들은 함께 그림을 그리며 실력을 겨뤘다.
당시 학생들은 농민화가들이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많이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농민화가들은 전문적인 교육이나 엄격한 회화기법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자유롭게 표현했다.
현장에서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그림으로 표현하는 방식이 오히려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여동 농민화의 명성이 점점 높아졌고, 협회 회원도 빠르게 늘어났다.
지원이 이어지면서 협회는 좁은 마당에서 널찍한 문화창작센터로 옮겼다.
촌민들은 마침내 전문적인 책상과 그림 도구를 갖게 됐다.
## 다시 붓을 잡은 화가들
여건이 좋아진 것을 누구보다 기뻐한 사람은 여통덕이었다.
그는 마을의 1세대 화가였지만 중간에 4~5년 동안 붓을 잡지 못했다.
당시 마을에서는 그림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농민화가들은 서로 작품을 보여주며 실력을 겨루는 경우도 많았다.
협회에 가입한 여통덕은 다시 붓을 잡기 시작했다.
2005년에는 처음으로 주급 미술전에 참가해 2등상을 받았다.
과거에는 취미로만 여겼던 농민화에서 수입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여동촌 농민화가들은 고향을 벗어나 시·성급 대회를 거쳐 전국으로 진출했다.
세상이 넓어졌고 농민화가들의 수입도 점점 늘어났다.
마침 저장성에서 아름다운 농촌 건설 사업이 추진되던 시기였다.
농촌 곳곳에서 아름다운 마을을 만들기 위한 사업이 진행되면서 주변 농민화가들의 인기도 크게 높아졌다.
여동의 농민화가들은 매년 벽화 작업을 통해 10만 위안에 달하는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벽화 하나를 완성하는 데 약 20일이 걸렸고 하루 수입이 600위안에 달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전에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 자신만의 그림을 찾다
이름처럼 호랑이 그리기를 좋아했던 한 화가는 초창기에 매일 많은 시간을 그림 연습에 쏟았지만 작품은 늘 만족스럽지 않았다.
어느 날 한 선생님이 그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 말은 그에게 큰 깨달음을 줬다.
당시 여동의 많은 화가들은 기본적인 회화 전문지식이 부족했고 자신의 취향에 따라 자유롭게 그림을 그렸다.
예술에서 상상력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예술 역시 결국 생활에서 나온다.
아무리 그림을 잘 그리려고 해도 실제로 본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생생하게 표현하기 어렵다.
선생님의 한마디를 들은 뒤 농민화가들은 주변의 세상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푸른 산과 산등성이, 황금빛 논밭, 황금빛 탈곡장, 산꽃, 그리고 마을의 정겨운 아침 풍경까지.
예술가의 시선으로 다시 이 땅을 바라보자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마당을 활보하는 수탉과 주변의 동물들도 새로운 그림의 소재가 됐다.
화가들은 단순히 동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동물의 움직임과 성격까지 세심하게 관찰했다.
깊이 있는 관찰과 이해를 바탕으로 그려낸 수탉은 위풍당당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쳤다.
2010년에는 그의 작품이 전국 농민화 전시회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한 작품의 성공은 다른 여동 화가들의 자신감을 키워주는 계기가 됐다.
## 생활에서 탄생한 농민화
여동 농민화는 농촌 생활과 노동 현장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마을의 새로운 모습을 묘사한 작품, 생태 신촌의 풍경, 이웃집의 대청을 그린 작품, 세월과 여가를 표현한 작품, 절기와 풍속을 담은 작품 등이 만들어졌다.
이 작품들은 전국적인 전시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
농민화의 명성이 높아지고 화가들이 전문 화가로 거듭나면서 여동 농민화의 작품 가격도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처음에는 농민이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화가가 되고, 다시 전문 예술가로 성장해 갔다.
하지만 그림을 향한 열정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낮에는 농기구를 들고 밭에서 일하고, 밤에는 붓을 들었다.
침실을 화실로 사용하고 문짝을 화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들이 그리는 선은 점점 섬세해졌고 색채는 더욱 풍부해졌다.
마음속 세계도 점점 넓어졌다.
그들은 사계절의 변화를 그렸고, 생활의 달콤함을 그렸으며, 자신들의 새로운 삶을 그렸다.
그리고 마침내 여동 농민화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 농민화에서 문화관광으로
농민화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여동촌을 찾는 관광객도 많아졌다.
농촌 관광 역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마을에는 미술관과 대나무공예관, 농경문화원 등이 들어섰고 젊은이들도 고향으로 돌아와 가게를 열었다.
다른 마을에서는 지역 특산물을 판매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여동촌의 가게에서는 농민화를 활용한 문화창의 제품을 판매했다.
특히 술병에는 아무런 그림이 없는 흰색 라벨을 붙여 놓고 관광객이 원하는 그림을 즉석에서 그려주는 서비스도 시작했다.
한 관광객이 술병에 연꽃을 그리고 싶다고 하자 화가는 그 자리에서 그림을 그려줬다.
농민화가 술병에 더해지면서 평범한 술이 특별한 문화상품으로 바뀌었다.
농민화가 인쇄된 실크와 스카프, 휴대전화 케이스, 다기 등 다양한 문화창의 상품도 판매됐다.
여동촌에서 판매하는 문화창의 상품은 통합적으로 설계하고 제작했다.
농민들은 자신의 회화 작품을 통해 수익을 얻을 수도 있었다.
## 농민화와 지역상품의 결합
여동촌의 전문 경영인들은 새로운 사업 모델을 찾기 시작했다.
2015년 그가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여동 농민화는 이미 어느 정도 명성을 얻고 있었지만, 실제로 높은 가격에 판매되는 작품은 많지 않았다.
농민화를 어떻게 활용해 마을의 발전을 이끌 수 있을까?
여동촌 사람들은 먼저 농민화를 활용한 문화창의 상품을 생각했다.
하지만 단순한 문화창의 상품만으로는 수익을 크게 높이기 어려웠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한 국수 가공소를 지나가다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진가승례의 국수 가공소는 수십 년 동안 운영되면서 좋은 국수를 만들어 주민들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산간마을을 벗어나지 못해 판매시장을 넓히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가공소에서는 국수를 도시로 가져가 판매하려고도 했지만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기가 쉽지 않았다.
여동촌 사람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포장 디자인을 고민했다.
농민화의 아름다운 그림을 국수 포장에 적용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새로운 포장 덕분에 산골마을에서 생산된 국수가 대도시에서 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기존에는 1년 매출이 30만 위안 정도였지만, 새로운 포장과 브랜드를 적용한 이후 연간 매출이 700만 위안 이상으로 늘었다.
20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이제는 연간 수천만 위안의 매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은 것은 국수뿐만이 아니었다.
여동촌의 귤도 농민화와 새로운 포장 디자인을 활용했다.
기존에는 귤을 그대로 판매하면 1근에 몇 마오에서 1위안 정도밖에 받지 못했다.
하지만 새로운 포장을 개발한 뒤에는 5~8위안에 판매할 수 있었고, 가격이 가장 높았을 때는 1근에 20위안까지 올라갔다.
생활에서 탄생한 농민화가 다시 생활 속으로 들어가 농산물 판매를 이끌게 된 것이다.
## 여동 농민화 미술관
2020년에는 약 4,200여 제곱미터 규모의 중국 향촌미술관이 여동촌에 세워졌다.
이 미술관은 여동 농민화를 집중적으로 전시하는 플랫폼이 됐다.
미술관에서는 화가들의 작품을 수집해 농민화 작품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또한 기업은 이러한 자원을 활용해 다양한 문화창의 상품을 연구·개발했다.
농민화 온라인 거래 플랫폼도 개설했다.
기업과 협력해 농민화로 브랜드 로고를 제작하고, 이를 통해 얻은 수익을 배당금 형태로 촌민들과 공유하고 있다.
2023년 여동촌 농민화와 문화창의 상품의 매출액은 3천만 위안을 넘어섰다.
촌민들의 1인당 연간 소득도 크게 증가했다.
## 농민화의 디지털화
이날 미술관의 멀티미디어실에서는 선생님의 지도 아래 태블릿으로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배우고 있었다.
이는 여동촌이 새롭게 모색하고 있는 방향이다.
농민화를 디지털 플랫폼과 결합하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그림을 한 점씩 만들 수 있지만 인터넷에서는 하나의 작품이 수천 개의 디지털 소장품으로 변신할 수 있다.
현재 여동촌 농민화 디지털 소장품 가운데 경매 최고가는 한 점에 4만 6천 위안을 기록했다.
농민화가 디지털 기술과 만나면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 그림에서 저작권 산업으로
오늘날 여동촌은 그림을 판매하던 단계에서 풍경을 판매하는 단계로, 다시 문화창의 상품을 판매하는 단계에서 저작권을 판매하는 단계로 산업을 발전시키고 있다.
농민화는 향촌진흥의 길에서 새로운 역할을 하고 있다.
오색찬란한 농민화는 산골마을의 유구한 역사를 그려내고 있다.
또한 고향을 벗어나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변화의 오늘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힘차게 비상하는 내일의 모습도 그리고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고향은 많은 추억을 남긴다.
맑은 물과 깊은 향수, 그리고 지나가는 세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고향의 모습.
농민화는 바로 이러한 삶과 기억을 화폭에 담아내고 있다.
여동촌의 농민화는 농민들의 삶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이제는 농촌의 경제를 변화시키고, 문화관광을 발전시키며, 지역 특산물의 가치를 높이는 새로운 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그림 한 장에서 시작된 작은 변화가 한 마을의 삶을 바꾸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미래를 만들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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