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버려진 소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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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 38회 작성일26-08-11 13:36본문
밤바다이다. 이루 말할수 없는 그 웅장함을 마주하고 감히 맥주를 홀짝이는 스물여덟살 녀자는 취해야 한다며 이악스레 맥주를 마시고있다. 취한다면 내 맘속에 앙금처럼 끈적이는 그 아픔을 털어버릴수 있을가? 취한 녀자의 주정인듯 아닌듯 그는 그렇게 내 말들을 들어줄수 있을가?
취한 나를 그는 침대에 눕혀주고있다. 그리고 일어서는 그의 팔을 내가 잡는다. 그냥 내옆에 있어줘, 그냥 내옆에서 팔베개 해줌 안되니?
고요함은, 이런 침묵은, 그리고 남자와의 어둠은 내겐 두려움이라는 단어와 이어진다. 내게 팔베개를 해주며 성준이는 작은 한숨을 내쉰다. 어둠속에서 3년전의 그가 떠오른다. 내옆에서 자줄래? 하고 물어보던 남자.
《나 세상 누구도 모르게, 혼자 간직한 비밀 있어. 너무나 아픈 기억이 있어. 너무 힘들고 무서웠어. 너에게 얘기할래.》
《너 아이 있었구나?》
어김없이 눈물이 흐른다. 안울려고 굳이 결심했던건 아니였기에 나 그냥 흐르려는 눈물을 내버려둔다. 그 눈물을 성준이가 닦아주고있다.
《너무 무서웠어. 8개월이 되였었어. 다음달이면 생리가 오겠지, 다음달이면 괜찮을거야, 그토록 불안에 떨다가 5개월이 되여서야 처음으로 병원에 갔어.》
《아이는 지금 어디 있어?》
성준이의 파르르 떠는 목소리가 어둠속에서 자꾸만 커지고있다.
내 아이는 어디에 있을가. 내 아이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가?
《죽였어. 8개월이 다 된 아이를, 내 배속에서 꿈뜰거리던 아이가, 날 힘들게 하던 아이가 그렇게 미워서 죽였어. 그런데 아직도 나 아이가 내 배속에 있는것 같아.》
《다 없었던 일이야. 거짓말이야. 넌 아이를 가진적도 없고, 죽인적도 없어. 우리 둘만이 알면 돼. 다른 사람에게 더이상 말하지 말어. 우리 둘만의 비밀 하자. 알았지?》
그해 여름의 병원, 홀로 찾아갔었던 그해 여름의 병원, 내 배속에서 느껴지는 태동에 이악스레 눈물을 참으며 수없이 미안하다는 말을 했던, 부디 아름다운 령혼이 되길 수없이 기도했던 그해 여름의 병원. 주사 한대에 죽어버린 아이, 이 세상의 빛을 싸늘한 죽음으로 느껴야 했던 내 아이, 무덤 하나 없이 죽어간 내 아이를 가슴에 품고 나는 힘들어야 했다. 그 아이는 나에게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었을가? 자기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죽음을 선택받은 아이는 죽어가면서 얼마나 아팠을가? 내 아이의 아픔까지 내가 짊어져야 했던 그해 여름을 남자는 없었던 일이라며 다 거짓말이라며 내 등을 한없이 쓰다듬어주고있다.
아침바다, 늘 그러듯이 내 손을 잡아주며 남자는 웃고있다.
그 바다가에서 작은 강아지 두마리가 아침섹스를 즐기고있다.
《저게 가장 동물적인 기본자세지. 암컷의 뒤로 수컷이 밀착하여있지. 아름답지 않어?》
남자는 지니고있던 디지털 카메라를 꺼내여 개들의 섹스장면을 찍고있었다.
그리고 제법은 징글스럽게 말하고있다.
《나중에 나도 저렇게 해보고싶다?》
징글스러워서 그답다. 가장 동물적인 자세, 그 말에 고개를 힐끔 돌려 개들을 보았다.
《어라 너 봤다?》
남자의 지꿎은 롱담에 나 웬지 쑥스럽다.
《하긴, 뭐, 포르노 동영상도 보는 기집애가 뭐 이런거엔 눈 깜짝 안하겠지.》
《까불지마.》
《그런데, 이거 더 야한거 알어? 이건 100% 라이브거든. 그리고 경치도 좋잖어? 아침바다를 바라보며. 모닝섹스. 개들이 진짜 인생 즐길줄 안다, 그지?》
가장 동물적인 기본자세. 인간도 동물인데 고급이라는 단어가 있어 인간에게는 옵션이 추가되여있다. 원하는 자세대로 잡으면 되니깐. 하지만 고급이라는 인간은 가끔은 동물보다 더 동물적일 때가 있다. 인간들이 가장 동물적인 기본자세로 흉내낼 때를 어쩜은 동물들이 보면 웃을지도 모른다. 섹스에 싫증이 났는지 아니면 게임이 끝났는지 암컷은 바다를 향해 뛰여가고있었다. 그래, 동물적인 자세가 좋다. 싫증이 나면 암컷은 언제든지 벗어날수 있으니. 동물의 세계에 그래서 강간은 없는거다. 남자가 우, 녀자가 아래라는 인간의 기본자세와는 틀리니깐. 그래서 일종의 경우 녀자는 일방적으로 원하지 않는 섹스를 해야 하는 경우를 배제할수 없는 인간이 어쩜 더 동물적이다!
《나 행복해, 아직은 니가 있어서.》
성준이는 괜히 신나하고있다.
《아직도 유효니?》
《뭐가?》
《니네 집 가정부와 니 애인이 되여주는 일.》
《무효인데?》
《무효이면 말구.》
《그냥 나랑 결혼하자! 그냥 까짓꺼 하는거라 하구, 눈 감구 나랑 결혼해주라.》
《그래, 까짓꺼 하지 뭐, 너 나중에 후회하기 없기다?》
아침해살 찬란한 바다가에서 나는 어쩜 행복해지는 법을 배우고있는지도 모른다. 까짓꺼이다, 인생은 재수없었던 일, 아프고 힘든 일들이 있었다면 까짓꺼 잊어버리면 된다. 그렇다고 지지리 힘들었던 내 날들이 성준이앞에서 당당하고 부끄럼이 없는건 아니다. 다만 그에게 빚을 진거라고, 살면서 그 빚을 갚으면 된다고 나는 스스로를 위로하고있다. 그리고 오늘만큼은 성준이가 행복해보여 나도 덩달아 행복할수 있다.
나는 취직을 했다.
컴퓨터 매장이였다. 그냥 평범한 일들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고싶었다. 하는 일은 늘 즐겁기만 했다. 하루종일 고객들을 상대하여 컴퓨터 사용을 설명해줘야 한다는게 가끔은 고단할 때도 있었지만 퇴근후 그와의 데이트를 생각하면 넉근히 견딜수 있다. 성준이는 이런 내 선택을 리해하지 못했다. 내 직업이 그럴듯하지 못하다는것이다. 그랬지만 직업을 바꾸라는 앙탈은 부리지 않는다.
가끔은 내 몸에 머무는 그의 눈빛을 보군 한다. 서른살 남자의 욕심을. 그 욕심을 내가 외면하고, 그러면 외면당한 욕심을 그 남자는 스스로 거두어들이고있다. 왜 그래야 되는지 서로가 잘 알고있어서 나는 그를 위해 마음이 아프고 그는 나를 위해 마음을 아파하고있다.
《성준아.》
밤 열시가 넘어, 그가 바래다준 내 기숙사앞에서 다정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고있었다.
《그냥 나 니 아빠트에서 자면 안될가?》
《왜 갑자기?》
《기숙사가 싫어서. 에어콘도 없고 더워.》
남자의 얼굴로 한가닥 신비한 미소가 스친다.
《재워줄거지?》
그의 아빠트로 가는 길우에서 그는 휘휘- 휘바람을 불고있다.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남자, 나도 그 남자처럼 밝게 웃어본다. 나는 어느새 이 남자의 빛갈로 물들고있다. 그와 함께 있는 순간은 단 한번도 유영이를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나를 즐겁게 해주는 남자, 나를 애틋하게 해주는 그가 오랜 시간 나에게 그리움이 되였던 유영이를 거짓말처럼 지워주고있다. 모든걸 담담히 받아들일수 있게 해준 그의 배려에 나는 조그마하게 보답하고있다.
남자는 주저주저하며 내옆에 눕는다. 괜찮어? 내 옷을 벗기며 남자는 또 한번 주저하며 물어본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희미하게 웃는다. 불이 꺼지고, 내 옷이 벗겨지고, 아픈 몸뚱아리가 그에게 펼쳐진다.
《사랑해, 행복하게 해줄게.》
내 눈물을 감춰주는 어둠이 감사하다.
《내가 니안에 있어, 내가 느껴져?》
그의 목을 내 팔이 감싼다. 어떤 의식 같은 이런 섹스가 빨리 끝나주길 바라며 나는 그에게 미안해하고있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다 끝날수 있어, 다시는 다른 남자땜에 울지 않을거야.
이불을 끄당겨 내 몸을 덮는다. 나는 괜히 부끄러워하고있다. 이러는 나를 바라보며 남자는 희죽거린다.
《치, 괜히 부끄러워하긴. 력사는 이루어졌구만.》
내 볼에 뽀뽀를 하며 남자는 내게 팔베개를 해준다.
《너 돈은 잘 버냐? 혼수 준비하고 하면 돈 많이 벌어야 한다? 대충 해오면 첫날밤에 너 쫓아낼거다?》
《얼마면 되는데? 나도 받을만큼 받어.》
《그래서 말이야, 너 직장 때려치우고 그냥 우리 집 가정부 해라. 월급 많이 줄게.》
《얼마 줄건데?》
《기본금 천원에다.》
《치, 내 월급보다 훨씬 더 적구만.》
《아니지. 잔업수당도 있다? 내가 특별히 두배씩 줄게.》
《참.》
《계산해봐, 기본금 천원이지? 하루에 잔업 5시간씩이면 잔업비만 기본금보다 훨씬 많을걸? 게다가 토요일 일요일 특근도 있지.》
《뭔 잔업시간이 그렇게 길어? 로동법 위반이다.》
《그냥 우리 이렇게 같이 살자. 지금부터.》
《그럴가? 그런데, 기본금은 싫으니, 잔업만 하면 안될가? 낮에는 맨날 청가하고. 오케이?》
《오케이!》
우리는 행복한듯 했다. 함께 백화점을 돌며 혼수준비물을 보면서도, 같이 마시는 한잔의 커피에도 우리는 행복해했다. 한유영, 그 사람을 다시 만나기전에. 어찌하여, 무슨 인연으로 우린 다시 만나야 했는지는 내가 알려고 해서 대답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였기에 나는 어느날 문득 내앞에 나타난 그를 어쩡쩡하게 바라보아야 했다.
《오랜만이야!》
그날도 다른 날과는 별로 다르지 않은 저녁무렵이였다. 집으로 가기 위해 성준이를 기다리는데 언젠가처럼 오랜만이야! 라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고있었다.
한유영?
《나야!》
하나도 안변했군. 그 말투, 그 목소리, 그리고 그 눈빛까지.
그때, 내 휴대폰이 울린다. 성준이였다. 어, 미안. 바이어하고 갑작스레 약속이 잡혀서 저녁 먹고 들어갈게. 일방적으로 끊긴 휴대폰을 닫는데, 한유영 그 남자가 술 한잔 괜찮지? 하면서 내 팔을 잡는다.
《어떻게 지냈어?》
《…》
참으로 많은 시간동안 유영이의 이 한마디를 그리워했다. 힘들었던 날들에, 어느날 문득 길을 가다가 유영이를 만날수 있기를 그토록 기도했었다. 그래서, 어떻게 지냈냐고 한마디만 물어봐주기를 그토록 간절히 기도했는데 이미 늦어버린 물음을 그 남자는 묻고있었다.
(무덤 하나 없이 죽어버린 내 아이와, 그 아이의 아빠만을 생각하며 살았어.)
《미안했어.》
취해서 내게 미안하다는 유영이의 손에서 나는 술잔을 빼앗아 빈 잔에 콜라를 따라주었다.
유영이는 이제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될수 없었다.
《나 곧 결혼해, 올거야?》
《안갈래.》
《그래 그럼. 내 남편이 될 사람이 기다리고있어, 나 가도 되지?》
일어서는데, 유영이가 날 부른다.
《혹시 그 남자랑 헤여지면 나에게 올래? 지금은 널 잡을수 없어 미안해!》
울보. 비틀거리는 그를 등지고 돌아서며 눈물이 출렁거린다. 그리고 그 눈물우에서 나는 한없이 표류하고있다.
돌아서는데 유영이가 사무치게 보고싶다. 그를 그리워했던 수많은 날들이 그에 대한 집착뿐이라고 스스로 했던 정리는 바짝 마른 가을락엽처럼 부서지고있다.
갑자기 그와 함께 나누어야 했던 아픔들을 나혼자 스스로 감당했다는것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개를 돌리는데, 어둠속으로 그의 모습이 점점 멀어져가고있었다.
가로등이 내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있었다.
검은 그림자, 그림자는 원래 검겠지만 오늘 나의 그림자는 여느때와는 달리 더욱더 진한듯하다. 고개를 들어 아빠트를 올려다본다. 불이 없었다. 하얗게 비워지는 머리가 검은 그림자를 더욱 검게 물들이는듯하다. 빈 집 거기도 검은 어둠이 묻어져 있겠지. 싫다. 빈 아빠트에 들어가기 싫다. 가로등에 기대여 좀은 짧아진 내 그림자를 바라보는데 빵빵 클랙슨소리가 들려온다. 성준이였다.
《왜 안들어가고?》
《그냥, 혼자 들어가기 싫어서.》
《나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성준이 차에 올라타며 나는 변명처럼 말했다.
《너 날 사랑하는거 맞어?》
백미러를 바라보며 성준이는 싱겁긴, 하면서 픽 웃는다.
《한번도 내가 꺼리낀적 없어?》
《그런거 없어. 나쁜 생각 하지 말어. 그냥 결혼하고 살면 되는거야.》
웃는게 힘들다. 그리고 이 남자를 따라가는 길이 오늘따라 유달리 힘들다.
도저히 잠을 이룰수 없는 밤이다. 이 남자는 언제까지 나의 아픔들을 받아줄수 있을가? 평생을 내 아픔들을 덮어주며 같이 살수 있을가?
혹시 그 남자랑 끝나면 나한테 올래? 어둠속에서 유영이의 목소리가 내 신경을 자꾸만 파고든다. 그리고 나는 그 목소리를 떨쳐버리지 못한다.
또 다른 아침,
서로가 말을 아끼는 아침이다. 성준이는 주섬주섬 출근준비를 하며 내게 넌짓이 물어본다.
《토요일 약속 있어?》
《아직.》
《그럼 약속 잡지 마.》
《왜?》
《직원 결혼식 있어. 수진이라고, 참, 결혼한다고 회사에 데리고 온 남자 몇이 되는지 기억도 안되는데 끝내는 결혼한다네? 뭐, 그럴듯한 사장 잡았대. 얼마전까지 어떤 남자랑 동거중이더만 다른 남자래. 걔가 임신중이거든, 누구 애인지 알거 뭐야?》
《…》
《나랑 같이 갈수 있지?》
《그러지 뭐.》
성준이가 두고간 청첩장을 무심코 집어들다가 나는 화들짝 하고 놀란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거기엔 한유영, 강수진의 결혼이라고 적혀져있었기때문이다. 이러는 내가 의외라는듯 성준이는 아는 사람이야? 라고 물어본다. 아니라고 대충 얼버무리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한유영?
또 다른 한유영이라는 남자가 있을가? 정말 내가 알고있는 한유영일가? 그렇다면? 정말 내가 알고있는 한유영이 맞다면? 나 어떡해야 하지?
출근길우에서 나는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가고있었다.
《저 남자니?》
매장앞에서 내앞에 유령처럼 나타난 유영.
《니가 어떻게 여기에?》
가볍게 웃음 지으며 한유영이는 내게 명함을 내민다.
《xx컴퓨터 대리점 대표 한유영》이라고 적힌 명함을 멋적게 보면서 나는 한유영 이 남자는 참으로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도 여러가지라고 스스로 생각하고있다.
《퇴근하구 직원 술 한잔 사주지 않을래?》
《ok!》
밝은 웃음의 유영이여서 다행이다.
《결혼할 사람이라는게 저 남자니?》
같은 직장일 보는 녀자애가 물어온다.
《응, 왜?》
《멋있어보여.》
《그럼. 나랑 결혼할 남자인데.》
《차가 멋있어보인다는 말이야. 바보야.》
나는 빙그레 웃었다.
술 한잔을 놓고 취할수 있는 밤이, 술 한잔을 놓고 우리가 함께 취할수 있는 밤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며 이악스레 술을 퍼먹는다.
《그러니깐- 우리도 참 질긴 인연이다, 그렇지?》
《그러게, 처음 널 보았을 때 넌 완전히 꼬마였는데. 이젠 결혼도 하구-》
《치, 나만 결혼하나? 너두 하면서 뭘.》
《알고있었어?》
《그럼. 나니깐 알지. 그런데 그 녀자랑은 결혼하지 마.》
《해야 돼. 너한테 벌받은거라 생각하고 할거야. 그니깐 너라도 잘 살아라고.》
《바보야, 그 녀자랑 결혼할거면 차라리 나랑 도망가자.》
《도망?》
한유영 그 남자의 눈이 느닷없이 커지고있다. 도망가자.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무작정 일어섰다. 너랑 결혼하기로 한 녀자가 강수진이라면 나랑 같이 도망가자. 나 니가 왜 결혼 결심했는지 잘 알고있으니 그런 리유라면 차라리 나랑 도망가자.
택시를 잡았다. 안된다는 유영이를 끌고 술취한 녀자가 도망을 가자고 한다.
이름도 모르는 작은 도시에 택시가 지친 령혼을 부리우고있다. 저 멀리 호텔이라고 적은 작은 간판이 네온등에 쌓여 나를 유혹하고있다. 성큼성큼 호텔을 향해 걸어가는 내뒤로 유영이가 따라오고있다.
해빛 찬란한 아침이다. 유영이의 미소는 해빛보다 더 찬란했다.
《그 녀자를 사랑해?》
《몰라, 그냥 결혼해야 돼.》
《사랑하지 않는다면 결혼하지 마. 사랑 아닌 리유로 결혼 결심했다면 차라리 나랑 하자.》
《미안해. 너의 남자는 어때? 사랑해?》
《엉, 내 비밀들을 함께 묻어둔 남자야.》
《그 비밀들이 나랑 상관이 되는거지?》
《응.》
《미안해.》
그 비밀들이 무엇인지조차 모른채 미안하다고 말하고있는 유영이가 애처로왔다. 그리고 그런 그를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봐야 하는 나도 그에겐 애처롭기 마찬가지다.
《다음 생에는 우리 꼭 결혼하자. 나 나쁜놈 되기 싫어. 용서해줘.》
작은 도시에서 그와 함께 보낸 3일.
꺼놓은 내 휴대폰으로 성준이의 메시지가 끊임없이 들어오지만 나는 기다리지 말라는 한마디만 보냈다. 물론 미안하다는 말에는 나의 진심이 포함되여있다. 나를 그렇게 애틋이 사랑해주던 두 남자에게 나 끝내는 못할 짓을 하고야말았다.
《잘 살어. 나 결혼식에는 오지 말고.》
한유영이는 돌아서고있었다. 나쁜놈이 되기 싫다는 그가 편히 돌아서길 바라며, 끝내는 나도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사랑해!》
아주 옛날의 그의 한마디, 결혼 첫날밤에 신부에게만 해줄거라는 그의 지꿎은 롱담을 떠올리며 흐르지 못한 눈물이 내 마음속 한줄기 강이 된다. 그와 나 사이를, 나와 성준이 사이를 흐르는 강. 그 강에 우리들의 끝난 인연을 띄우며 나는 간절히 바라고있다. 그는 분명히 우리의 아기도 사랑했을거라고. 사랑한다는 말이 죽어간 우리 아기의 예쁜 무덤이 될수 있기를. 이젠 무덤 하나 없이 죽어간 우리 아기의 령혼이 안식처를 찾을수 있을거라고.
그렇게 돌아서다가 못된 남자는 나를 불러세운다.
《이런 말 하기 그런데, 피임약 사먹어. 78시간내 응급 피임약 있을거야. 알았지?》
해살보다 더 밝은 웃음을 웃는다. 생리가 끊난지 4일째, 임신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이젠 아는 나이가 되였다. 3년전의 바보가 아니다.
쳇, 3년전에나 이런 말을 해주지. 혼자서 중얼거리며 눈물이 흐른다.
이젠 나는 어데로 가야 할가.
간밤에 내린 물구덩이에로 잠자리떼가 몰려들고있다. 쌍쌍이 꼬리를 달싹이며 그 물구덩이에 알을 쓸고있다. 바보들이, 찬란한 해빛이 비추면 금방 물이 말라버림을 모르는 바보들이.
바보같이 손을 휘휘 저으며 잠자리떼들을 쫓는 나는 내 머리속을 하얗게 비우고있다.
이젠 기억은 다만 기록이 될것만 같다.
그리고 한장의 종이우에 적혀진 내 기록들을 내 눈물이 지우고있다.
눈물들이 모여서 칵테일 쇼를 하는 바다우에서...
취한 나를 그는 침대에 눕혀주고있다. 그리고 일어서는 그의 팔을 내가 잡는다. 그냥 내옆에 있어줘, 그냥 내옆에서 팔베개 해줌 안되니?
고요함은, 이런 침묵은, 그리고 남자와의 어둠은 내겐 두려움이라는 단어와 이어진다. 내게 팔베개를 해주며 성준이는 작은 한숨을 내쉰다. 어둠속에서 3년전의 그가 떠오른다. 내옆에서 자줄래? 하고 물어보던 남자.
《나 세상 누구도 모르게, 혼자 간직한 비밀 있어. 너무나 아픈 기억이 있어. 너무 힘들고 무서웠어. 너에게 얘기할래.》
《너 아이 있었구나?》
어김없이 눈물이 흐른다. 안울려고 굳이 결심했던건 아니였기에 나 그냥 흐르려는 눈물을 내버려둔다. 그 눈물을 성준이가 닦아주고있다.
《너무 무서웠어. 8개월이 되였었어. 다음달이면 생리가 오겠지, 다음달이면 괜찮을거야, 그토록 불안에 떨다가 5개월이 되여서야 처음으로 병원에 갔어.》
《아이는 지금 어디 있어?》
성준이의 파르르 떠는 목소리가 어둠속에서 자꾸만 커지고있다.
내 아이는 어디에 있을가. 내 아이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가?
《죽였어. 8개월이 다 된 아이를, 내 배속에서 꿈뜰거리던 아이가, 날 힘들게 하던 아이가 그렇게 미워서 죽였어. 그런데 아직도 나 아이가 내 배속에 있는것 같아.》
《다 없었던 일이야. 거짓말이야. 넌 아이를 가진적도 없고, 죽인적도 없어. 우리 둘만이 알면 돼. 다른 사람에게 더이상 말하지 말어. 우리 둘만의 비밀 하자. 알았지?》
그해 여름의 병원, 홀로 찾아갔었던 그해 여름의 병원, 내 배속에서 느껴지는 태동에 이악스레 눈물을 참으며 수없이 미안하다는 말을 했던, 부디 아름다운 령혼이 되길 수없이 기도했던 그해 여름의 병원. 주사 한대에 죽어버린 아이, 이 세상의 빛을 싸늘한 죽음으로 느껴야 했던 내 아이, 무덤 하나 없이 죽어간 내 아이를 가슴에 품고 나는 힘들어야 했다. 그 아이는 나에게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었을가? 자기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죽음을 선택받은 아이는 죽어가면서 얼마나 아팠을가? 내 아이의 아픔까지 내가 짊어져야 했던 그해 여름을 남자는 없었던 일이라며 다 거짓말이라며 내 등을 한없이 쓰다듬어주고있다.
아침바다, 늘 그러듯이 내 손을 잡아주며 남자는 웃고있다.
그 바다가에서 작은 강아지 두마리가 아침섹스를 즐기고있다.
《저게 가장 동물적인 기본자세지. 암컷의 뒤로 수컷이 밀착하여있지. 아름답지 않어?》
남자는 지니고있던 디지털 카메라를 꺼내여 개들의 섹스장면을 찍고있었다.
그리고 제법은 징글스럽게 말하고있다.
《나중에 나도 저렇게 해보고싶다?》
징글스러워서 그답다. 가장 동물적인 자세, 그 말에 고개를 힐끔 돌려 개들을 보았다.
《어라 너 봤다?》
남자의 지꿎은 롱담에 나 웬지 쑥스럽다.
《하긴, 뭐, 포르노 동영상도 보는 기집애가 뭐 이런거엔 눈 깜짝 안하겠지.》
《까불지마.》
《그런데, 이거 더 야한거 알어? 이건 100% 라이브거든. 그리고 경치도 좋잖어? 아침바다를 바라보며. 모닝섹스. 개들이 진짜 인생 즐길줄 안다, 그지?》
가장 동물적인 기본자세. 인간도 동물인데 고급이라는 단어가 있어 인간에게는 옵션이 추가되여있다. 원하는 자세대로 잡으면 되니깐. 하지만 고급이라는 인간은 가끔은 동물보다 더 동물적일 때가 있다. 인간들이 가장 동물적인 기본자세로 흉내낼 때를 어쩜은 동물들이 보면 웃을지도 모른다. 섹스에 싫증이 났는지 아니면 게임이 끝났는지 암컷은 바다를 향해 뛰여가고있었다. 그래, 동물적인 자세가 좋다. 싫증이 나면 암컷은 언제든지 벗어날수 있으니. 동물의 세계에 그래서 강간은 없는거다. 남자가 우, 녀자가 아래라는 인간의 기본자세와는 틀리니깐. 그래서 일종의 경우 녀자는 일방적으로 원하지 않는 섹스를 해야 하는 경우를 배제할수 없는 인간이 어쩜 더 동물적이다!
《나 행복해, 아직은 니가 있어서.》
성준이는 괜히 신나하고있다.
《아직도 유효니?》
《뭐가?》
《니네 집 가정부와 니 애인이 되여주는 일.》
《무효인데?》
《무효이면 말구.》
《그냥 나랑 결혼하자! 그냥 까짓꺼 하는거라 하구, 눈 감구 나랑 결혼해주라.》
《그래, 까짓꺼 하지 뭐, 너 나중에 후회하기 없기다?》
아침해살 찬란한 바다가에서 나는 어쩜 행복해지는 법을 배우고있는지도 모른다. 까짓꺼이다, 인생은 재수없었던 일, 아프고 힘든 일들이 있었다면 까짓꺼 잊어버리면 된다. 그렇다고 지지리 힘들었던 내 날들이 성준이앞에서 당당하고 부끄럼이 없는건 아니다. 다만 그에게 빚을 진거라고, 살면서 그 빚을 갚으면 된다고 나는 스스로를 위로하고있다. 그리고 오늘만큼은 성준이가 행복해보여 나도 덩달아 행복할수 있다.
나는 취직을 했다.
컴퓨터 매장이였다. 그냥 평범한 일들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고싶었다. 하는 일은 늘 즐겁기만 했다. 하루종일 고객들을 상대하여 컴퓨터 사용을 설명해줘야 한다는게 가끔은 고단할 때도 있었지만 퇴근후 그와의 데이트를 생각하면 넉근히 견딜수 있다. 성준이는 이런 내 선택을 리해하지 못했다. 내 직업이 그럴듯하지 못하다는것이다. 그랬지만 직업을 바꾸라는 앙탈은 부리지 않는다.
가끔은 내 몸에 머무는 그의 눈빛을 보군 한다. 서른살 남자의 욕심을. 그 욕심을 내가 외면하고, 그러면 외면당한 욕심을 그 남자는 스스로 거두어들이고있다. 왜 그래야 되는지 서로가 잘 알고있어서 나는 그를 위해 마음이 아프고 그는 나를 위해 마음을 아파하고있다.
《성준아.》
밤 열시가 넘어, 그가 바래다준 내 기숙사앞에서 다정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고있었다.
《그냥 나 니 아빠트에서 자면 안될가?》
《왜 갑자기?》
《기숙사가 싫어서. 에어콘도 없고 더워.》
남자의 얼굴로 한가닥 신비한 미소가 스친다.
《재워줄거지?》
그의 아빠트로 가는 길우에서 그는 휘휘- 휘바람을 불고있다.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남자, 나도 그 남자처럼 밝게 웃어본다. 나는 어느새 이 남자의 빛갈로 물들고있다. 그와 함께 있는 순간은 단 한번도 유영이를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나를 즐겁게 해주는 남자, 나를 애틋하게 해주는 그가 오랜 시간 나에게 그리움이 되였던 유영이를 거짓말처럼 지워주고있다. 모든걸 담담히 받아들일수 있게 해준 그의 배려에 나는 조그마하게 보답하고있다.
남자는 주저주저하며 내옆에 눕는다. 괜찮어? 내 옷을 벗기며 남자는 또 한번 주저하며 물어본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희미하게 웃는다. 불이 꺼지고, 내 옷이 벗겨지고, 아픈 몸뚱아리가 그에게 펼쳐진다.
《사랑해, 행복하게 해줄게.》
내 눈물을 감춰주는 어둠이 감사하다.
《내가 니안에 있어, 내가 느껴져?》
그의 목을 내 팔이 감싼다. 어떤 의식 같은 이런 섹스가 빨리 끝나주길 바라며 나는 그에게 미안해하고있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다 끝날수 있어, 다시는 다른 남자땜에 울지 않을거야.
이불을 끄당겨 내 몸을 덮는다. 나는 괜히 부끄러워하고있다. 이러는 나를 바라보며 남자는 희죽거린다.
《치, 괜히 부끄러워하긴. 력사는 이루어졌구만.》
내 볼에 뽀뽀를 하며 남자는 내게 팔베개를 해준다.
《너 돈은 잘 버냐? 혼수 준비하고 하면 돈 많이 벌어야 한다? 대충 해오면 첫날밤에 너 쫓아낼거다?》
《얼마면 되는데? 나도 받을만큼 받어.》
《그래서 말이야, 너 직장 때려치우고 그냥 우리 집 가정부 해라. 월급 많이 줄게.》
《얼마 줄건데?》
《기본금 천원에다.》
《치, 내 월급보다 훨씬 더 적구만.》
《아니지. 잔업수당도 있다? 내가 특별히 두배씩 줄게.》
《참.》
《계산해봐, 기본금 천원이지? 하루에 잔업 5시간씩이면 잔업비만 기본금보다 훨씬 많을걸? 게다가 토요일 일요일 특근도 있지.》
《뭔 잔업시간이 그렇게 길어? 로동법 위반이다.》
《그냥 우리 이렇게 같이 살자. 지금부터.》
《그럴가? 그런데, 기본금은 싫으니, 잔업만 하면 안될가? 낮에는 맨날 청가하고. 오케이?》
《오케이!》
우리는 행복한듯 했다. 함께 백화점을 돌며 혼수준비물을 보면서도, 같이 마시는 한잔의 커피에도 우리는 행복해했다. 한유영, 그 사람을 다시 만나기전에. 어찌하여, 무슨 인연으로 우린 다시 만나야 했는지는 내가 알려고 해서 대답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였기에 나는 어느날 문득 내앞에 나타난 그를 어쩡쩡하게 바라보아야 했다.
《오랜만이야!》
그날도 다른 날과는 별로 다르지 않은 저녁무렵이였다. 집으로 가기 위해 성준이를 기다리는데 언젠가처럼 오랜만이야! 라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고있었다.
한유영?
《나야!》
하나도 안변했군. 그 말투, 그 목소리, 그리고 그 눈빛까지.
그때, 내 휴대폰이 울린다. 성준이였다. 어, 미안. 바이어하고 갑작스레 약속이 잡혀서 저녁 먹고 들어갈게. 일방적으로 끊긴 휴대폰을 닫는데, 한유영 그 남자가 술 한잔 괜찮지? 하면서 내 팔을 잡는다.
《어떻게 지냈어?》
《…》
참으로 많은 시간동안 유영이의 이 한마디를 그리워했다. 힘들었던 날들에, 어느날 문득 길을 가다가 유영이를 만날수 있기를 그토록 기도했었다. 그래서, 어떻게 지냈냐고 한마디만 물어봐주기를 그토록 간절히 기도했는데 이미 늦어버린 물음을 그 남자는 묻고있었다.
(무덤 하나 없이 죽어버린 내 아이와, 그 아이의 아빠만을 생각하며 살았어.)
《미안했어.》
취해서 내게 미안하다는 유영이의 손에서 나는 술잔을 빼앗아 빈 잔에 콜라를 따라주었다.
유영이는 이제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될수 없었다.
《나 곧 결혼해, 올거야?》
《안갈래.》
《그래 그럼. 내 남편이 될 사람이 기다리고있어, 나 가도 되지?》
일어서는데, 유영이가 날 부른다.
《혹시 그 남자랑 헤여지면 나에게 올래? 지금은 널 잡을수 없어 미안해!》
울보. 비틀거리는 그를 등지고 돌아서며 눈물이 출렁거린다. 그리고 그 눈물우에서 나는 한없이 표류하고있다.
돌아서는데 유영이가 사무치게 보고싶다. 그를 그리워했던 수많은 날들이 그에 대한 집착뿐이라고 스스로 했던 정리는 바짝 마른 가을락엽처럼 부서지고있다.
갑자기 그와 함께 나누어야 했던 아픔들을 나혼자 스스로 감당했다는것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개를 돌리는데, 어둠속으로 그의 모습이 점점 멀어져가고있었다.
가로등이 내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있었다.
검은 그림자, 그림자는 원래 검겠지만 오늘 나의 그림자는 여느때와는 달리 더욱더 진한듯하다. 고개를 들어 아빠트를 올려다본다. 불이 없었다. 하얗게 비워지는 머리가 검은 그림자를 더욱 검게 물들이는듯하다. 빈 집 거기도 검은 어둠이 묻어져 있겠지. 싫다. 빈 아빠트에 들어가기 싫다. 가로등에 기대여 좀은 짧아진 내 그림자를 바라보는데 빵빵 클랙슨소리가 들려온다. 성준이였다.
《왜 안들어가고?》
《그냥, 혼자 들어가기 싫어서.》
《나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성준이 차에 올라타며 나는 변명처럼 말했다.
《너 날 사랑하는거 맞어?》
백미러를 바라보며 성준이는 싱겁긴, 하면서 픽 웃는다.
《한번도 내가 꺼리낀적 없어?》
《그런거 없어. 나쁜 생각 하지 말어. 그냥 결혼하고 살면 되는거야.》
웃는게 힘들다. 그리고 이 남자를 따라가는 길이 오늘따라 유달리 힘들다.
도저히 잠을 이룰수 없는 밤이다. 이 남자는 언제까지 나의 아픔들을 받아줄수 있을가? 평생을 내 아픔들을 덮어주며 같이 살수 있을가?
혹시 그 남자랑 끝나면 나한테 올래? 어둠속에서 유영이의 목소리가 내 신경을 자꾸만 파고든다. 그리고 나는 그 목소리를 떨쳐버리지 못한다.
또 다른 아침,
서로가 말을 아끼는 아침이다. 성준이는 주섬주섬 출근준비를 하며 내게 넌짓이 물어본다.
《토요일 약속 있어?》
《아직.》
《그럼 약속 잡지 마.》
《왜?》
《직원 결혼식 있어. 수진이라고, 참, 결혼한다고 회사에 데리고 온 남자 몇이 되는지 기억도 안되는데 끝내는 결혼한다네? 뭐, 그럴듯한 사장 잡았대. 얼마전까지 어떤 남자랑 동거중이더만 다른 남자래. 걔가 임신중이거든, 누구 애인지 알거 뭐야?》
《…》
《나랑 같이 갈수 있지?》
《그러지 뭐.》
성준이가 두고간 청첩장을 무심코 집어들다가 나는 화들짝 하고 놀란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거기엔 한유영, 강수진의 결혼이라고 적혀져있었기때문이다. 이러는 내가 의외라는듯 성준이는 아는 사람이야? 라고 물어본다. 아니라고 대충 얼버무리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한유영?
또 다른 한유영이라는 남자가 있을가? 정말 내가 알고있는 한유영일가? 그렇다면? 정말 내가 알고있는 한유영이 맞다면? 나 어떡해야 하지?
출근길우에서 나는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가고있었다.
《저 남자니?》
매장앞에서 내앞에 유령처럼 나타난 유영.
《니가 어떻게 여기에?》
가볍게 웃음 지으며 한유영이는 내게 명함을 내민다.
《xx컴퓨터 대리점 대표 한유영》이라고 적힌 명함을 멋적게 보면서 나는 한유영 이 남자는 참으로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도 여러가지라고 스스로 생각하고있다.
《퇴근하구 직원 술 한잔 사주지 않을래?》
《ok!》
밝은 웃음의 유영이여서 다행이다.
《결혼할 사람이라는게 저 남자니?》
같은 직장일 보는 녀자애가 물어온다.
《응, 왜?》
《멋있어보여.》
《그럼. 나랑 결혼할 남자인데.》
《차가 멋있어보인다는 말이야. 바보야.》
나는 빙그레 웃었다.
술 한잔을 놓고 취할수 있는 밤이, 술 한잔을 놓고 우리가 함께 취할수 있는 밤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며 이악스레 술을 퍼먹는다.
《그러니깐- 우리도 참 질긴 인연이다, 그렇지?》
《그러게, 처음 널 보았을 때 넌 완전히 꼬마였는데. 이젠 결혼도 하구-》
《치, 나만 결혼하나? 너두 하면서 뭘.》
《알고있었어?》
《그럼. 나니깐 알지. 그런데 그 녀자랑은 결혼하지 마.》
《해야 돼. 너한테 벌받은거라 생각하고 할거야. 그니깐 너라도 잘 살아라고.》
《바보야, 그 녀자랑 결혼할거면 차라리 나랑 도망가자.》
《도망?》
한유영 그 남자의 눈이 느닷없이 커지고있다. 도망가자.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무작정 일어섰다. 너랑 결혼하기로 한 녀자가 강수진이라면 나랑 같이 도망가자. 나 니가 왜 결혼 결심했는지 잘 알고있으니 그런 리유라면 차라리 나랑 도망가자.
택시를 잡았다. 안된다는 유영이를 끌고 술취한 녀자가 도망을 가자고 한다.
이름도 모르는 작은 도시에 택시가 지친 령혼을 부리우고있다. 저 멀리 호텔이라고 적은 작은 간판이 네온등에 쌓여 나를 유혹하고있다. 성큼성큼 호텔을 향해 걸어가는 내뒤로 유영이가 따라오고있다.
해빛 찬란한 아침이다. 유영이의 미소는 해빛보다 더 찬란했다.
《그 녀자를 사랑해?》
《몰라, 그냥 결혼해야 돼.》
《사랑하지 않는다면 결혼하지 마. 사랑 아닌 리유로 결혼 결심했다면 차라리 나랑 하자.》
《미안해. 너의 남자는 어때? 사랑해?》
《엉, 내 비밀들을 함께 묻어둔 남자야.》
《그 비밀들이 나랑 상관이 되는거지?》
《응.》
《미안해.》
그 비밀들이 무엇인지조차 모른채 미안하다고 말하고있는 유영이가 애처로왔다. 그리고 그런 그를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봐야 하는 나도 그에겐 애처롭기 마찬가지다.
《다음 생에는 우리 꼭 결혼하자. 나 나쁜놈 되기 싫어. 용서해줘.》
작은 도시에서 그와 함께 보낸 3일.
꺼놓은 내 휴대폰으로 성준이의 메시지가 끊임없이 들어오지만 나는 기다리지 말라는 한마디만 보냈다. 물론 미안하다는 말에는 나의 진심이 포함되여있다. 나를 그렇게 애틋이 사랑해주던 두 남자에게 나 끝내는 못할 짓을 하고야말았다.
《잘 살어. 나 결혼식에는 오지 말고.》
한유영이는 돌아서고있었다. 나쁜놈이 되기 싫다는 그가 편히 돌아서길 바라며, 끝내는 나도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사랑해!》
아주 옛날의 그의 한마디, 결혼 첫날밤에 신부에게만 해줄거라는 그의 지꿎은 롱담을 떠올리며 흐르지 못한 눈물이 내 마음속 한줄기 강이 된다. 그와 나 사이를, 나와 성준이 사이를 흐르는 강. 그 강에 우리들의 끝난 인연을 띄우며 나는 간절히 바라고있다. 그는 분명히 우리의 아기도 사랑했을거라고. 사랑한다는 말이 죽어간 우리 아기의 예쁜 무덤이 될수 있기를. 이젠 무덤 하나 없이 죽어간 우리 아기의 령혼이 안식처를 찾을수 있을거라고.
그렇게 돌아서다가 못된 남자는 나를 불러세운다.
《이런 말 하기 그런데, 피임약 사먹어. 78시간내 응급 피임약 있을거야. 알았지?》
해살보다 더 밝은 웃음을 웃는다. 생리가 끊난지 4일째, 임신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이젠 아는 나이가 되였다. 3년전의 바보가 아니다.
쳇, 3년전에나 이런 말을 해주지. 혼자서 중얼거리며 눈물이 흐른다.
이젠 나는 어데로 가야 할가.
간밤에 내린 물구덩이에로 잠자리떼가 몰려들고있다. 쌍쌍이 꼬리를 달싹이며 그 물구덩이에 알을 쓸고있다. 바보들이, 찬란한 해빛이 비추면 금방 물이 말라버림을 모르는 바보들이.
바보같이 손을 휘휘 저으며 잠자리떼들을 쫓는 나는 내 머리속을 하얗게 비우고있다.
이젠 기억은 다만 기록이 될것만 같다.
그리고 한장의 종이우에 적혀진 내 기록들을 내 눈물이 지우고있다.
눈물들이 모여서 칵테일 쇼를 하는 바다우에서...

